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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의열단

by goggum 2025. 3. 21.

일제강점기, 조선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각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독립운동은 크게 외교적인 방식, 군사적 투쟁,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특히 무장 투쟁을 통해 직접적으로 일본의 주요 거점을 타격하는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윤봉길의 의거,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활동은 일제의 심장부를 겨냥한 대표적인 독립운동 사례로 기록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무장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펼친 항일 투쟁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의열단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의열단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한민족의 울분을 담은 총성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에는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며 식민 지배를 본격화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러한 조선 침략 정책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이에 대한 분노는 조선 내외에서 점점 고조되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은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령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한 청년이 그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바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 이토 히로부미를 즉사시켰고, 이 역사적인 순간은 대한제국의 굴욕을 만회하고 조선 민족의 항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은 체포된 후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의거였음을 주장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내가 조국을 위해 할 일을 다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을 맹세한 사실도 공개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의 의지를 꺾기 위해 사형을 선고했고,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의거는 단순한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조선 민족 전체의 분노와 독립 의지를 담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안중근의 희생은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중요한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훗날 윤봉길과 의열단 등의 활동에 영감을 주었다.

 

윤봉길의 의거: 일본 군부를 강타한 독립운동의 쾌거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축하 행사에서 한 조선 청년이 폭탄을 던졌다. 이 청년은 바로 독립운동가 윤봉길이었다. 그의 폭탄 공격은 일본 고위 관료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며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국제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행동이 필요했다. 이에 김구는 윤봉길을 불러 거사를 준비하게 했고, 윤봉길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출정을 앞두고 “나는 조선의 청년으로서 조국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1932년 4월 29일, 일본군과 고위 관료들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모여 천장절(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고 있었다. 이때 행사장 한편에서 한 청년이 도시락과 물병을 꺼내더니, 갑자기 단상 위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이 터지자 일본 고위 장교들과 관료들이 즉사하거나 크게 부상당했다. 윤봉길은 곧바로 체포되었지만, 그의 거사는 이미 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윤봉길의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적인 행동이었다. 김구는 그의 의거를 두고 “백만 대군이 있어도 이와 같은 공훈은 세울 수 없다”고 평가했으며, 그의 행동은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그의 행동에 강력히 반발하며 조선 내 독립운동 탄압을 강화했지만, 윤봉길의 희생은 오히려 독립운동을 더욱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원봉과 의열단: 무력 투쟁을 선도한 독립운동 조직

 

1919년 3·1운동 이후,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이 한계를 드러내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적극적인 무력 투쟁을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김원봉을 중심으로 의열단(義烈團)이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일본의 주요 관청과 기관을 직접 공격하는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창설되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처단한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이들은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직접적인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의열단원들은 일본 경찰서,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같은 식민 통치 기관을 주요 목표로 삼아 폭탄 투척, 암살 등의 거사를 감행했다.

1920년대, 의열단원들은 조선총독부 폭파 시도, 종로 경찰서 공격,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등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1926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은 조선에서 일본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기관을 직접 타격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속적인 무장 투쟁만으로 독립을 이루기는 어려웠으며, 의열단은 점차 조직적인 군사 훈련을 받으며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김원봉은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며 보다 체계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후 조선의용대를 조직하며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게 된다.

의열단의 활동은 독립운동의 무력 투쟁을 대표하는 사례로, 이후 한국광복군과 다른 독립군 조직들이 무장 항쟁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투쟁은 단순한 거사가 아니라, 무력 항쟁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앞당기고자 했던 적극적인 항일 저항의 상징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했으며, 무장 독립운동은 일본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윤봉길의 의거,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동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단순한 민족 운동을 넘어, 실질적인 저항과 투쟁을 통해 일본에 맞선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이들의 희생은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숭고한 투쟁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