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흐름 속에는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으나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수많은 왕국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당시 정치, 문화, 외교, 무역 등 여러 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고, 후대 국가들에 영향을 남겼지만, 정복과 병합, 자연재해, 내부 분열 등의 이유로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부여, 가야, 발해, 후백제는 각기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번성했으며, 한민족의 역사적 다양성과 지역성, 문화적 융합을 보여주는 중요한 왕국들이다. 이 글에서는 이 네 나라 중 부여, 발해, 후백제를 중심으로 그 흥망과 문화적 의의를 살펴본다.
북방 고대국가의 중심, 부여의 흥망
부여는 고조선의 멸망 이후 북방에서 형성된 고대국가로, 오늘날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나라였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는 이후 고구려, 백제, 발해 등 여러 나라의 기원 또는 선조 국가로 간주되며, 한국사 초기 국가 형성의 핵심 고리로 평가된다. 부여는 엄격한 법률과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갖춘 정비된 국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군장 중심 사회였다.
부여의 중심은 왕과 귀족 계층으로 구성된 중앙 권력에 있었고, 사출도라 불리는 독특한 지방 행정 구역을 통해 주변 지역을 다스렸다. 부여의 사출도 체계는 후에 고구려의 5부제나 백제의 5방제로 계승되었을 정도로 행정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부여는 예의와 절차를 중요시하는 문화적 특색도 강했고, 제사와 장례 문화 또한 발달했다. 특히 부여의 무덤 양식과 장례 의식은 이후 삼국의 장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부여는 점차 고구려의 성장과 중국 세력의 압박 속에서 쇠퇴했다. 3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고, 5세기 무렵에는 결국 고구려에 병합되며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후 부여의 왕족과 귀족들은 고구려나 백제 등으로 이주하거나 귀속되었으며, 일부는 남하하여 한반도의 다른 지역 문명과도 융합되었다.
부여는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삼국시대에 이어졌고, 한국 고대국가의 정치적, 문화적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존재로 평가된다. 고대사의 흐름에서 부여는 단순히 사라진 나라가 아니라, 이후 여러 민족과 문명의 뿌리를 형성한 조상 국가의 하나로 남아 있다.
고구려의 뒤를 잇고 바다를 지배했던 발해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과 말갈족을 중심으로 세워진 국가로, 동북아시아 북부를 무대로 독자적인 문명을 꽃피웠던 나라였다. 698년,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며 고구려의 유산을 계승한다고 선언했고, 이후 약 200여 년간 독립된 국가로 존속하며 북방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발해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계승자였지만, 정치적·지리적 특성상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등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다. 당나라와는 때로는 갈등을, 때로는 외교를 이어갔으며, 일본과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하며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발해는 해상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동해안을 통한 무역과 교류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
행정적으로는 중앙집권 체제를 바탕으로 5경 15부 62주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며, 수도는 여러 차례 옮겨졌으나 상경 용천부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당의 장안성을 모방한 도시 계획이 이루어졌고, 불교와 유교, 토착 신앙이 융합된 독특한 문화가 발전했다. 또한 발해는 고구려 전통의 고분 양식, 벽화, 기와 등 건축 및 미술에서도 뛰어난 예술성을 보였다.
그러나 10세기 초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급부상하면서 발해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926년, 요나라의 침공으로 발해는 멸망하고 만주의 지배권은 요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으며, 고려는 스스로를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국가로 인식하였다.
발해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확장시킨 북방의 제국이었다. 비록 한반도에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의 후계자라는 점, 독자적인 문화와 제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사라진 나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백제의 부활을 꿈꿨던 후백제의 짧은 역사
후삼국 시대는 신라의 중앙 집권이 약화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왕국들의 각축장이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후백제는 백제의 옛 땅을 기반으로 등장한 나라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후백제의 건국자는 견훤으로, 그는 지방 호족 출신으로 당시 신라의 혼란을 틈타 자신만의 세력을 규합하여 900년에 나라를 세웠다.
후백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세력 확대가 아니라, 백제 유민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되살리고자 한 운동이기도 했다. 견훤은 스스로 백제의 계승자임을 자처했고, 문화와 제도에서도 백제의 전통을 일부 이어가고자 했다. 수도는 완산주(오늘날 전주)였고, 지리적 이점과 농업 기반을 통해 경제적 안정도 꾀했다.
군사적으로 후백제는 초기에 매우 강력했다. 견훤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한때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해 왕을 위협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치 내부에서는 반란과 갈등이 이어졌고, 특히 아들 신검과의 권력 다툼이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
후백제의 멸망은 936년, 고려 태조 왕건과의 결정적인 전투인 공산 전투와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비롯되었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축출당한 뒤 고려로 귀순했고, 왕건은 그를 활용하여 후백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한반도는 고려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고, 후백제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후백제는 역사적으로 짧은 생애를 가졌지만, 당시 백제 유민들의 문화적 자부심과 지역적 정체성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 존재는 단지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지역성과 역사 계승의식이 결합된 국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부여, 발해, 후백제는 모두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체성과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다양한 역사적 이유로 사라진 왕국들이다. 이들의 역사는 단순히 멸망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 한국인의 문화적 뿌리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사라진 왕국들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기리는 일이자, 한국사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이 된다. 이들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건축, 유물, 문화유산, 지명 등을 통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후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