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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속 전염병과 사회 변화

by goggum 2025. 3. 30.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은 단순한 의학적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와 정치,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 한국사에서도 다양한 전염병이 유행하며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이는 제도 개혁과 생활 방식의 변화, 새로운 과학과 지식의 수용으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의 홍역과 두창, 개항기의 콜레라 대유행, 그리고 20세기 초의 스페인 독감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글에서는 각각의 시기별 전염병과 그것이 가져온 사회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한국사 속 전염병과 사회 변화
한국사 속 전염병과 사회 변화

 

조선 시대의 홍역과 두창, 전통 사회를 흔들다

 

조선 시대는 의료 체계와 위생 환경이 현대에 비해 매우 취약했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대체로 질병을 운명이나 천벌로 여겼고, 전염병은 신의 노여움을 상징하는 재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웠던 질병은 단연 홍역과 두창(천연두)이었다. 이 두 질병은 반복적으로 조선 사회를 휩쓸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특히 유아와 어린이의 생존율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홍역은 발열과 발진, 고열을 동반하는 급성 전염병으로, 대체로 겨울과 봄에 유행했다. 홍역은 유아에게 치명적이었으며, 한 번 발병하면 한 집안에 여러 명이 동시에 감염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홍역의 피해가 심각해 기록에 수차례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정조 대에는 홍역으로 인해 수만 명의 아이들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창은 홍역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으로 여겨졌으며, 얼굴과 몸에 발진이 일어난 뒤 흉터가 남는 특징 때문에 ‘마마’라고도 불렸다. 사람들은 두창을 극도로 두려워했고, 마마신(痘神)을 섬기거나 부적을 붙이는 풍습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아이가 두창에 걸리면 “살아서 나오면 복 있는 아이”라고 할 만큼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전염병의 유행은 조선 사회에 다양한 변화를 불러왔다. 우선, 의학 지식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한의학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를 기반으로 한 백성용 의서들이 간행되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그 대표적인 예로, 일반 백성이 따라할 수 있는 처방과 예방책을 소개해 질병 대처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전염병의 반복은 사회의 출산과 양육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유아 사망률이 높은 사회에서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 일반적인 생존 전략이 되었고, 이는 가부장제 사회 구조와 가족 제도의 강화로 이어졌다. 동시에 두창에 대한 면역을 확보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결혼 시장에서도 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전염병은 조선의 전통적인 신앙 체계와도 얽혀 있었다. 역병이 창궐하면 마을에서는 산제나 마을굿 등을 통해 신의 분노를 달래려는 의례가 행해졌고, 민간 신앙과 의례가 더욱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질병에 대한 대응은 점차 과학적 접근으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전염병은 두려움의 존재로서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개항기 콜레라 유행, 새로운 시대의 공포

 

19세기 후반 개항과 함께 조선은 서양과 일본을 비롯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전염병에도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콜레라는 당시 조선 사회에 가장 충격을 안겨준 신종 질병이었다. 사람들은 이 낯선 병이 갑작스레 퍼지는 것을 보고 ‘괴질’이라 부르며 큰 두려움을 나타냈다.

콜레라는 복통, 구토, 설사, 심한 탈수 증상을 동반하며 빠르게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전염 속도가 매우 빨라서 한 마을에 한 명이 걸리면 순식간에 수십, 수백 명이 감염되었고,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어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188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했고, 그중 1895년과 1907년 유행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콜레라의 유입은 단순한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 서구 문명과 본격적으로 맞닿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선박, 외국 상인, 조계지 주민들을 통해 콜레라가 퍼졌다는 인식은 외국인에 대한 공포와 반감으로 이어졌으며, 외세와 전염병의 연결고리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와 지식인들은 전염병에 대한 대응을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개항 이후 설립된 근대 병원과 의료 기관은 콜레라 환자 수용과 격리에 앞장섰고, 위생 교육과 방역 활동이 점차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는 일본과 서양에서 들어온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정부 차원의 방역 행정이 시도되었으며, 이는 현대적 보건의료 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콜레라의 대유행은 사람들의 생활 습관과 위생 의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수돗물, 위생 화장실, 손 씻기, 음식물 끓이기 등과 같은 위생 개념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으며, 감염병의 원인에 대한 인식이 점차 미신에서 과학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콜레라는 근대 한국 사회에 ‘의학의 필요성’, ‘국가 주도의 보건 행정’, ‘개인의 위생 관념’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온 질병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한복판에서, 콜레라는 단순한 전염병을 넘어 문화와 사고방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20세기 초 스페인 독감과 한국 사회의 변화

 

20세기 초 세계를 강타한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은 한반도에도 예외 없이 큰 피해를 안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8년경 전 세계적으로 퍼진 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한국에서도 수십만 명의 감염자와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남기며,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방역과 보건 행정은 총독부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대응은 소극적이고 미흡했으며,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는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농촌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병이 퍼졌고, 사람들은 개인의 힘으로만 질병에 맞서야 했다.

스페인 독감은 당시 사회 전체에 깊은 공포와 불신을 퍼뜨렸다. 가족 단위의 감염으로 인해 생계가 마비되는 가정이 늘었고,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도 타격을 입었다.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했고, 사람들은 모임과 제사를 꺼리며 고립된 생활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공동체 중심의 전통 사회 구조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보건 위생에 대한 국가적 요구와 현대적 병원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근대 병원 설립과 위생 관련 법령을 정비하게 되었고, 감염병에 대한 인식 역시 점차 과학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를 통해 전염병이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사회 개혁의 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스페인 독감은 신문, 잡지, 대중문학 등에서도 주요 소재로 다루어지며, 질병과 인간 사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낳았다. 감염병이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스페인 독감 이후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위생 관념, 병원 중심의 치료, 국가의 책임 있는 의료 제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는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보건 행정의 초석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국사 속 전염병은 단순히 의학적 현상이 아닌, 사회 구조와 문화 전반을 변화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조선 시대의 홍역과 두창은 한의학과 가족 제도에 영향을 주었고, 개항기의 콜레라는 서양 의학과 국가 위생 체계의 필요성을 불러일으켰으며, 스페인 독감은 현대적 병원 시스템과 위생 의식 확산의 계기가 되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질병이 위기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서와 변화를 만들어내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