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고려를 비롯한 한국의 역사 속에는 단지 왕과 귀족의 권력다툼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억눌린 민중과 주변부의 저항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사회 구조를 흔들고 변화를 유도해온 과정이 있었다. 정권 교체와 체제 개혁은 종종 하층민의 분노와 집단 행동에서 촉발되었으며, 이들은 단순한 무장 반란을 넘어 당시 사회 모순과 국가 운영의 한계를 드러내는 거울이었다. 특히 망이·망소이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국가와 민중의 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며, 각각 고려·조선 후기·조선 말기의 구조적 위기를 드러낸 상징적인 민중운동이었다.
고려 시대 천민의 반란, 망이·망소이의 난
고려 시대는 건국 초기에는 비교적 신분 간 이동이 유연했으나, 점차 중앙 귀족 중심의 문벌 체제가 공고해지며 하층민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졌다. 특히 노비와 천민 계층은 재산처럼 거래되고, 노동 착취에 시달리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하층민 반란이 바로 1176년의 망이·망소이의 난이다. 이 반란은 고려사에서 보기 드물게 노비가 주도한 무장 봉기로 기록되며,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망이와 망소이는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공노비 출신의 형제로, 당시 공주 명학소(현 공주시 일대) 지역에서 중앙 정부의 부패한 관리에 맞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수백 명의 노비와 백성들을 규합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명학소를 독립적인 정치 공간처럼 운영하며 고려 정부에 대항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지역을 장악하며 관청을 공격하고, 군현 단위의 행정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이 봉기는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라, 노비가 스스로 지도자가 되어 체제를 부정하고 다른 사회 질서를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망이·망소이는 자신들만의 행정 조직을 갖추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는 등 자치적 운영을 시도했다. 이는 신분 제도의 절대성에 도전한 첫 번째 사례로 평가된다.
결국 고려 정부는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했고, 망이와 망소이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 여파는 크고 길었다. 이후 공주 지역은 ‘충절의 고장’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의 더욱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었으며, 노비에 대한 경계심이 강화되었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단순한 폭동이 아닌, 하층민도 정치적 의식과 조직적 행동력을 갖출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이들은 패배했지만,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기에 더욱 자주 나타난 하층민 봉기의 전조로 기능했으며, 이후의 민란에서 중요한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조선 후기 북방의 분노, 홍경래의 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민 반란 중 하나로 꼽히는 홍경래의 난(1811)은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착취에 시달리던 평안도 지역 민중의 집단적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다. 이 반란은 단지 농민의 생존권 투쟁을 넘어서, 조선 후기 지역 차별과 중앙 정치의 무능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치적 성격까지 띠고 있었다.
홍경래는 원래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의 실학자이자 지도자로, 평안도 지역에서 상공업 활동과 민중 계몽에 힘쓰던 인물이었다. 당시 평안도는 조선 정부로부터 ‘변방’ 취급을 받았고, 중앙 정계 진출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과거 시험에서도 노골적인 차별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한반도 북부 지역의 자연재해, 조세 과중, 지방 관리들의 부패가 겹치면서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홍경래는 이러한 불만을 조직화하여 수천 명의 농민, 광부, 상인들을 규합, 의병식 조직을 구성하고 ‘부패 양반 타도’와 ‘중앙 정치 개혁’을 주장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빠르게 평안도 내 여러 고을을 장악했고, 정주성까지 함락시키며 조선 정부를 크게 위협했다.
홍경래는 기존의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양반 중심의 통치 체계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서민 중심의 사회 운영을 꿈꾸는 이상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연설문과 격문에는 민중을 위한 정의와 개혁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는 조선 사회에서 전례 없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반란은 결국 관군의 대규모 진압 작전에 의해 수 개월 만에 무너졌고, 홍경래는 패배 후 피살되었다. 반란 참여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으며, 이후 평안도에 대한 중앙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농민과 중간층의 불만이 단순한 경제적 요구를 넘어서 사회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과 변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며, 민중 주체의 역사를 열어나가는 분기점이 되었다.
민중이 직접 요구한 개혁, 동학농민운동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은 한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명확한 개혁 의지를 내세운 민중 운동이었다. 단순한 민란이 아닌 민중의 자발적인 조직과 정권에 대한 제도적 요구, 그리고 외세 배척까지 아우른 이 운동은 근대 한국사의 변곡점으로 평가받는다.
운동의 발단은 전라도 고부 군수의 부패와 착취에 대한 민중의 항의에서 비롯되었으며, 동학을 믿던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들고일어나게 된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했으며, 이는 당시 양반 중심의 유교적 질서에 강한 도전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 봉기는 부패한 관리의 처벌과 탐관오리의 축출, 그리고 농민의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제도 개혁 중심의 항쟁이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화약을 통해 정부와 ‘집강소’라는 공동 자치 조직을 운영하며 민중 주도 개혁을 실현해 나갔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민중 정치 참여 사례로 기록된다.
하지만 정부가 일본군을 끌어들이며 상황은 급변했다. 외세의 개입은 농민군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2차 봉기는 반외세·반봉건 혁명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정부군의 연합 작전에 의해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체포되고, 운동은 진압당하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내용은 근대 시민 의식의 출발점이자, 이후 갑오개혁과 독립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구호는 단지 정치 권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질서와 국민 중심의 나라를 만들자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이 운동은 특히 농민과 하층민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지도자를 선출하고, 개혁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체적 민중 운동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전봉준은 이후 항일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었고, 동학의 정신은 천도교를 통해 계승되며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망이·망소이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은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 속에서 일어났지만, 공통적으로 기득권 질서에 대한 저항과 사회 정의 실현에 대한 열망이라는 점에서 이어진다. 이들은 비록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역사의 흐름을 움직인 민중의 목소리였으며, 구조적 모순을 드러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들 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함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실천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다. 한국사의 민중은 언제나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낸 주체였고, 그 흐름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