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세계는 제국과 왕조의 시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체계를 실험하는 거대한 전환점에 접어들었다. 그중에서도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단지 한 왕조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이라는 인류사적 변화를 일으켰다. 수백 년간 이어져온 로마노프 왕조는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했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자처한 소비에트 연방이었다. 이 혁명은 지구 반대편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냉전의 씨앗을 뿌리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국제 정치에 깊이 남아 있다. 이번 글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배경과 과정,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 그리고 소비에트 체제의 성립까지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제국의 피로와 불만 – 로마노프 왕조의 위기
러시아 제국은 17세기부터 약 300년간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해 온 로마노프 왕조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이 제국은 점점 시대 변화에 뒤처진 낡은 체제로 전락하고 있었다. 산업화가 늦게 진행된 탓에 도시 노동자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고, 농민들의 삶은 봉건적 지주 제도에 묶여 있었으며, 정치 참여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왕실은 개혁을 외면하고, 군사력과 귀족 중심의 질서를 고수하며 불만을 억눌렀다.
특히 1905년, 일어난 1차 러시아 혁명은 제국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국민의 분노를 직면했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이어졌다. 이때 처음 등장한 ‘소비에트(Soviet, 평의회)’ 조직은 이후 혁명의 주체로 발전하게 된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헌법 제정과 의회(Duma) 설치를 약속하며 사태를 수습했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고, 체제에 대한 신뢰는 계속 무너져 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참전했지만, 준비 부족과 지휘 체계의 혼란, 군수물자의 열세로 인해 전선은 붕괴되고 사상자 수만 늘어났다. 전쟁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고,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도시민과 농민의 생활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2세는 전쟁에서의 명예로운 승리를 고집하며 물러서지 않았고, 황후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과 같은 인물에 정치적 권한을 위임해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황제는 무능하고, 귀족은 탐욕스럽고, 민중은 굶주린다”는 평가가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 두 번의 격변
1917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식량 부족과 전쟁 피로에 지친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를 시작했고, 그 흐름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군대마저 반란에 가담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결국 붕괴되었고,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게 된다. 이로써 300년 가까이 이어진 전제 군주제는 막을 내리고,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이 사건이 바로 2월 혁명이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기존 체제를 대체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고, 민중이 원하는 '평화, 빵, 토지'를 실현하지 못했다. 특히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결정은 민심을 더욱 떠나게 만들었다. 이 틈을 타 부상한 세력이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이었다. 그들은 ‘전쟁 즉각 중단, 지주 토지 몰수, 노동자 권력 강화’를 주장하며 대중의 지지를 빠르게 흡수했고, 각지의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1917년 10월, 결국 볼셰비키는 무장봉기를 감행하고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며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10월 혁명이다. 혁명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성공했지만, 그 여파는 거대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즉시 독일과 평화 협정을 체결해 전쟁에서 이탈했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했다. 동시에 모든 산업과 금융을 국유화하며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를 준비했다.
그러나 혁명은 곧 내전의 시작을 의미했다. 왕당파(백군), 자유주의자, 외세(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적군’으로 뭉쳐 소비에트 정부에 대항했고, 이른바 ‘붉은 군대’ 대 ‘백군’의 내전이 벌어졌다. 레온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뛰어난 조직력과 중앙집권적 통제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폭력과 공포를 통한 체제 수호 방식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왕족의 처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8년,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이 모두 총살되며,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과 공산주의 국가의 실험
내전이 종결된 후, 레닌과 볼셰비키는 단일 정당 체제를 구축하고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수립을 공식 선언한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공산주의 국가’였으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을 세계에 제시한 사건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코카서스 지역 등을 묶어 다민족 국가 형태로 구성되었고,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자치의 연방 체제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공산당의 통제가 강력히 작용하는 체계였다.
레닌은 신경제정책(NEP)을 통해 제한적 시장 경제를 도입하며 경제 회복을 시도했지만, 그가 1924년 병으로 사망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한다. 이 시기를 틈타 권력투쟁이 격화되었고, 결국 요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스탈린은 이후 강력한 산업화 정책과 집단농장 체제를 추진하며, 빠른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지만, 동시에 공포 정치와 대숙청, 개인 숭배 등 또 다른 형태의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소련의 등장은 국제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서방 세계는 이 공산주의 실험을 경계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과의 냉전 체제가 본격화된다.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사회주의 교육, 의료, 산업 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했고,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었다. 혁명 이후의 소련은 단순한 국가를 넘어, 하나의 이념이 지배하는 체제로서 국제 정치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
러시아 혁명은 단순한 체제 전복이나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이 중심이 되어 기존 권력과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이념과 체계를 실험한 거대한 사회적 실험이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은 그 자체로 상징적 사건이었고, 볼셰비키의 등장은 20세기 내내 이어질 정치적 긴장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은 자본주의 세계에 던진 도전이었으며, 이후 전 세계의 사회주의 운동과 해방 투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고, 수많은 희생과 고통, 억압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한 사회가 불평등과 억압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 흔적은 여전히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러시아 혁명은 실패와 성공, 이상과 현실, 자유와 통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은 사건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혁명을 통해, 변화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삶과 권리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