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역사는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며 형성한 정치적 변천사의 연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의 등장은 후삼국의 혼란을 정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후백제와 후고구려, 그리고 신라가 대치하며 갈등을 벌이던 10세기 초, 고려는 무력과 외교, 그리고 이상주의를 결합한 건국 전략을 통해 그 중심에 우뚝 섰다. 건국자인 태조 왕건은 단순한 무장이 아닌, 뛰어난 외교 감각과 포용력을 바탕으로 삼한을 통합했고, 이후 고려는 지속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치며 자주성과 생존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번 글에서는 고려의 건국 배경, 왕건의 외교와 내정 전략, 고려가 펼친 대거란·대송·대몽 외교의 특징까지 차례로 살펴보며, 고려의 정치적 유연성과 현실감각을 조명하고자 한다.
후삼국 통합과 왕건의 건국 전략
고려는 918년,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등장했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의 쇠퇴로 인해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고,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와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가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신라 역시 존속하며 복잡한 삼국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등장한 인물이 바로 왕건이다. 그는 궁예 휘하의 장군으로 활약하던 중, 궁예의 폭정과 실정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후 고려를 건국한다.
왕건은 단순히 군사력으로만 세력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포용과 설득, 결혼동맹과 정치적 융화 전략을 병행했다. 그는 후삼국의 다양한 세력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각 지역의 호족들과 연맹을 맺는 형태로 세력을 다져갔다. 특히 혼인 외교는 왕건의 가장 큰 정치적 무기였다. 각 지역 유력 호족들과 혼인을 통해 신뢰와 동맹을 형성함으로써 반란을 예방하고 통합 기반을 다졌다.
또한 왕건은 건국 이후 곧바로 훈요 10조를 남기며 후대 통치자들에게 고려가 지향해야 할 국가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 훈요는 단지 종교적 지침만이 아니라, 불교 보호, 민심 수습, 호족 존중 등 정치 전반에 걸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는 왕건이 현실 정치의 복잡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서이기도 했다.
무력에 의한 정복은 견훤과의 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신라가 스스로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내정상 신라 계승의 명분까지 확보한 왕건은 936년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고려는 이렇게 ‘통합과 포용, 명분과 현실’이 어우러진 절묘한 정치 감각 위에서 태어난 국가였다.
대외관계의 핵심 – 송나라와의 외교, 거란과의 갈등
고려의 대외정책은 시작부터 실리와 자주성 사이의 줄타기였다. 건국 직후 왕건은 중국 대륙에서 새롭게 등장한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중시했다. 송은 당나라 이후 혼란한 오대십국 시대를 정리하고 한족 중심 질서를 회복한 국가로,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통해 국제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문화·경제적 교류를 강화하고자 했다. 고려는 일찍이 송과의 수교를 통해 문물 교류를 활발히 했고, 송의 선진적인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자국의 제도 정비에 반영했다. 이는 고려가 문화적 자존심을 유지하면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 상징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북방에서는 거란(요나라)라는 새로운 변수와 마주하게 된다. 거란은 만주와 중국 북부를 지배한 강력한 유목민족 국가로, 고려에 대해 조공 외교와 속국화를 요구했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며 자주성을 강조했고, 이는 곧 거란과의 충돌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1019)이다.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 속에서도 고려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결사항전했으며, 결국 거란의 남진을 저지하고 고려의 자주 외교 노선을 수호해냈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매우 유연하고 실리적인 외교를 병행했다. 군사적으로는 거란에 맞서 싸웠지만, 한편으로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대외적인 정당성을 확보했고, 전쟁 후에도 적절한 외교 사절을 보내 화친을 모색함으로써 불필요한 장기 전쟁을 피했다. 고려의 외교는 결코 고립적이지 않았고,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전략적으로 자국의 입지를 조율해간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몽골과의 장기 투쟁 – 끝까지 지켜낸 고려의 명맥
고려 외교의 또 다른 중대한 시험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몽골은 세계사상 유례없는 정복 제국으로 성장하며 동아시아 대부분을 제패했고, 고려 역시 그 세력권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몽골의 요구는 거란 때보다 더 강력했고, 고려는 이에 맞서 장기간에 걸쳐 저항과 협상, 그리고 굴복과 자주성 회복을 반복하는 복잡한 외교 전술을 펼쳐야 했다.
몽골의 침략은 1231년부터 본격화되었고, 이에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전을 택했다. 당시 고려의 무신정권은 몽골에 대한 완전한 항복을 거부하며 육지 방어를 포기하고 바다를 이용한 방어 전략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국가의 피해를 줄이면서도 자주적인 항전을 가능하게 만든 전략적 판단이었다. 고려는 이후 수차례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몽골과 직접적인 합병을 피했고, 원 간섭기라는 특수한 시기를 겪으면서도 독립된 왕조 체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원나라에 대한 형식적인 복속을 택하면서도 고려는 점차 왕실의 자주성 회복, 내정의 정비,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특히 공민왕 시기에는 반원 정책이 추진되며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자주 외교 노선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처럼 고려는 제국주의적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도 완전한 복속을 피하고, 국가의 틀과 정통성을 지켜낸 절묘한 외교 전략을 실현해낸 셈이다.
몽골과의 관계에서 보여준 고려의 자세는 무력 항전만이 아닌, 현실을 반영한 외교적 타협과 민족적 정체성의 보존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의 건국과 외교는 단순한 전쟁과 협상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품고 있다. 왕건은 무력보다 포용, 정복보다 설득을 앞세워 혼란의 시대를 정리하고 국가를 건국했다. 그 후계자들은 송과의 교류, 거란과의 전쟁, 몽골과의 장기 투쟁 속에서도 자주성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하며 고려의 명맥을 지켜냈다. 이는 당시 국제 질서 속에서 ‘강소국의 생존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다.
오늘날에도 국력의 격차 속에서 우리는 고려처럼 현명한 외교 감각과 현실적 판단,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필요하다. 고려는 굴종하지 않되 무리한 독립도 추구하지 않았고, 힘으로 맞서되 타협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한 절묘한 균형의 외교야말로 고려가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며,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되새겨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