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 바로 세종대왕이다. 단순히 훌륭한 왕이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는 조선의 문화·과학·정치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이끈 인물이며,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를 창제한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문명 개혁자다. 언어는 한 사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이며, 그 언어를 글자로 표기하는 문자의 존재는 문화의 뿌리를 형성한다. 백성을 위한 문자, 백성 스스로 읽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든 세종의 결단은 단순한 문자 개발이 아니라 민본주의 철학과 과학기술, 교육정책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대혁신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어떤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과 사회적 반응, 그리고 그 의미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차례대로 살펴보려 한다.
백성을 위한 왕, 세종의 민본주의 통치 철학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 국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약 32년간 재위하며 조선을 안정기에서 황금기로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문장력과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즉위 후에도 학문과 실용정책에 대한 강한 관심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정치의 중심에 '백성'을 두는 민본주의 사상을 실천하려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사대부 중심의 통치를 넘어서 백성이 실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 세금, 농사, 건강,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농민을 위해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질병 예방을 위해 『향약집성방』을 만들었으며, 의학과 천문학, 음악, 군사기술 등에서도 다수의 혁신을 이루었다. 그 모든 기반에는 "백성이 생활 속에서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당시 백성들이 중국 한자 중심의 문자를 자유롭게 활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조선 사회는 한문 중심의 학문과 행정 체계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는 곧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사대부 남성들만의 특권이 되는 구조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백성은 법과 행정, 문학, 교육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사회적 불평등과 민중의 무지로 연결되었다.
세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을 위한 문자 창제를 결심한다. 이는 단순히 교육을 장려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타파하고, 백성이 국가 정책과 문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민주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대왕은 왕의 권위와 지식을 백성에게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스스로 깨우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준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과정과 학문적 정교함
한글 창제는 단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다년간의 연구와 실험을 거쳐,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는 이를 반포한다. 훈민정음 창제의 중심에는 세종의 주도적 역할과, 그의 학문적 열정, 실용적 과학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당시 창제된 이 문자가 단순한 기호 체계가 아니라 음운학적, 철학적, 미학적으로도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 체계는 발성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이는 세계 문자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창제 방식이다. 예를 들어,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ㅁ'은 입을 다문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며, 모음은 하늘(ㆍ), 땅(ㅡ), 사람(ㅣ)의 원리를 적용해 삼재(三才)의 철학적 의미를 담았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단순한 생활용 문자로서의 기능을 넘어, 조선이 당시 어떤 철학과 과학적 사고를 갖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문명 수준의 상징이었다. 또한 세종은 이 문자가 단지 학문이나 종교적 사용에 그치지 않도록 백성들이 실제로 생활 속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와 예문, 번역 작업을 함께 추진했다.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 국문 문헌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고 명명하며, 이 문자가 백성의 말과 감정을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를 바랐다. 이는 당시 조선이 단지 왕조 정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의 주체로서 새로운 이상을 제시한 행위였다.
반발과 보급,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의미
한글이 창제되었을 때, 모두가 이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의 사대부들과 집권 관료들 상당수는 훈민정음을 “언문(言文)”이라 부르며 천시했고, 한문이라는 전통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들은 "한문을 못하는 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대했고, 정치적으로도 세종의 문자가 신분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 문자의 보급을 위해 학령과 관청문서, 불경 번역, 농서·의서 편찬에 훈민정음을 직접 적용했으며, 이후 국문학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면서 훈민정음은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된다.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공적인 글은 대부분 한문이었고, 한글은 ‘여성의 글’ 혹은 ‘민간의 글’로 제한되었지만, 바로 이 점에서 한글은 민중의 문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글의 진정한 힘은 그 누구든, 배움의 기회만 있다면 읽고 쓸 수 있게 만든 문자라는 점이다. 음소문자 구조와 소리나는 대로 적는 원리는 문자 생활의 문턱을 낮췄고, 이는 결국 한국 사회가 높은 문자 해독률과 교육 수준을 자랑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특히 한글은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교육과 산업화의 핵심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 자판에 한글을 입력하며 메시지를 주고받고, 문학과 학문, 문화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한글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이는 곧 15세기 한 왕의 결단이 21세기의 삶을 여는 문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창제된 문자’이며, 그 창제자의 철학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문자는 오직 한글뿐이다.
세종대왕은 단지 위대한 임금이 아닌, 한 민족의 문화를 통합하고 미래를 설계한 문명적 지도자였다. 그의 한글 창제는 단순한 문자의 발명이 아니라, 백성에게 지식과 표현의 권리를 되돌려주는 혁명이었고, 나아가 신분과 계급을 넘어선 사회적 해방의 서막이었다. 세종의 통치는 학문과 민생, 예술과 과학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한글은 그 정신이 문자로 구현된 결정체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문화 강국으로 우뚝 서 있는 배경에는, 바로 이 한글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백성을 사랑한 임금” 세종대왕이 있다. 우리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하며 그의 유산을 되새기고 있지만, 그 의미는 하루의 기념일에 머물지 않는다. 한글을 읽고 쓰며 살아가는 모든 일상 속에, 우리는 매 순간 세종대왕의 비전과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본의 역사’다.